용문산, 설악의 공룡능선인듯,가야산 만물상인듯,온갖 기묘한 바위들 오르내리는 재미까지는 좋았는데, 눈 축하 세레머니에 오겹살까지 ~

경상도 지역 산불로 등산 다니는 모양새가
그런데 어찌하겠는가 ~
모두가 내 맘 같았을 것이다.
가까운 곳이라 조금 일찍 도착하였고
소나무사이로 하늘 색깔을 보시라
모처럼 미세먼지 없고 얼마나 상쾌했는지 ~
용문산은
용문사, 마당바위를 지나 계곡으로
오르는 것도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다.
마당바위
무슨 지형적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이런 모양의 바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또 정상도 좋지만
이곳 용문산은 이런 쉴 수 있는 자리가 많아
더 좋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용문산은
용문사와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를
빼고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
아직 이길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927~935)의
세자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이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자라났다고도
한다.
오늘은 용문사 은행나무 이야기와
봄이 오기전 겨울산 마지막 풍경 사진으로
이야기 할 것이다.
마의태자가 꽂은 지팡이 이야기다.
"이제 짐의 덕이 쇠하여 더 이상 사직을 보존하기 어렵게 되었노라, 왕자들은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훗날을 도모하기 바란다."
953년,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신흥세력에 대항할 길이 없자
군신회의를 열고 고려에 항복할 것을 논의 하였다.
태자는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결국 고려에 귀부(歸附)를 청하는 국서가 전달되었다.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있으니 충신의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굳게 지켜볼 것이지 천년사직을 어찌 하루 아침에 남에게 내어준단 말인가!"
태자는 한탄하며 비단옷을 벗어버리고 베옷(麻衣)으로 갈아입었다.
나라를 잃어버린 죄인으로서 어찌 비단옷을 입을 수 있겠느냐며 누더기 옷에 지팡이 하나를 들고 궁전을 떠났다.
태자는 정처 없이 길을 떠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문전걸식으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다.
그러다 태자는 개골산(금강산)으로 길을 잡았다.
불문에 귀의하여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 결심했던 것이다.
경주를 떠나 북으로 길을 재촉하던 중,
충주 땅을 지날 때였다.
월악산에는 누이 덕주공주가 수도하고
있는 암자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덕주공주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월악산을 향해 걷는 왕자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왕자는 막 얼음이 녹는 계곡을 따라 올라
갔다.
숲이 울창해서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월악산은 천혜의 요새로 신라와 고구려가 다투었던 곳이기도 했다.
공주는 월악산 높은 곳에 신라의 중권을 꿈꾸며 거대한 마애불을 조성하고 있었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공주는 여느 비구니와 다름없었다.
비단옷에 값진 보석을 지니고 수많은 시녀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와는 엄청난 차이였다.
"공주! 얼마나 심려가 크신가, 이 오라비는 개골산으로 가던길에 공주가 보고 싶어 찾아 왔노라."
"그리운 올아버니! 소승은 이미 불가에
의지한 몸입니다. 불사를 완성하고 죽는 것만이 소승에게 주어진 짐입니다.
부디 몸조심하고 후일을 도모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덕주공주는 염주 를 건 손을 마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태자는 공주와 헤어져 다시 북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한수를 건너 경기도 양평 땅으로
갔다.
태자였을 때 자신을 학문의 길로 이끌어 주신 사부 의상대사(衣裳大師)가 세운 용문사(龍門寺)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마의태자는 당대의 최고 석학이신 의상대사와 마주하여 밤이 깊도록 조국 신라와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태자는 새벽 예불이 시작되기 전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경주 땅에서부터 계속 짚고 왔던 지팡이를 용문사 마당 한구석에 깊이 꽂았다.
"조국 신라여, 영원하라! 내 마음은 너와 함께 있겠노라. 나의 마음이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는 징표로 이 지팡이에서 싹이 돋고 꽃이 피리라."
마의태자는 그렇게 하여 용문산을 넘어 개골산으로 갔다.
그리고 아무도 태자를 보지 못했다.
태자는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생활하며 일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또 소문에는 금강산에서 신선이 되었다고 하고 해금강의 해룡이 되어 경주 감포와 삼일포 간을 수시로 헤엄쳐 다니고
있다고도 했다.
용문사 경내에 있는 태자가 꽂은 지팡이는 싹이 돋고 자라 높이 62m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되었다.
이 나무의 열린 모가 진 은행이 태자의
강직한 성격을 나타낸다고 사람들은 입으로 전했다.
이 은행나무의 추정 수령은 1100년으로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은행나무는 오랜세월 전란때에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라 하여 천왕목이라고도 불렀고,
조선 세종때에는 정 3품 이상에 해당하는
벼슬 당상직첩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정미년 의병이 일어났을때 일본군이 절을 불태웠으나 이 나무만은 화를 면했고,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는 순간 피가 쏟아지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쳤다고 한다.
그만큼 영물 나무였다는 얘기일것이다.
꽃말: 장수(長壽), 거절이다.
그 밖에 멋진 주목도 있고
경내에는 볼거리도 많은 여행지였다.
하산시 풍경이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치 못했었다.
시간 있을때
꽃 이야기와 함께 다시한번 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