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보 - 주흘산 문경새재
○ 주흘산 (1,076m / 경북 문경)
백두대간을 북에 두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아 오른 주흘산(1,076m)은 예부터 문경의 진산으로 받들어져온 산이다. 정상 남사면이 수백 길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 문경읍에서 보면 철옹성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조 때는 조정에서 매년 주흘산을 진산으로 받드는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남한땅 백두대간 가운데 약 5분의 1에 해당하는 긴 능선이 문경땅을 거치면서 수많은 산봉을 일으켜 놓았는데 등산인들에게 문경하면 주흘산이 떠오르는 것은 육산과 바위산의 멋을 겸한 빼어난 산세와 함께 문경새재를 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81년 새재길 일대를 도립공원으로 지정했다.
문경의 진산 주흘산(1,075m)은 영남대로의 관문 문경새재를 지키고 있는 산이다. 조령산, 포암산, 월악산 등과 더불어 주흘산은 산세가 아름답고 문경새재 등의 역사적 전설이 담겨있는 산이다. 정상에서는 멀리 소백산까지 볼 수 있으며 가까이로는 문경읍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운달산, 희양산, 조령산, 월악산이 원을 그려 주흘산이 망루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듯하다. 높이 10m의 수정같은 여궁폭포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혜를 입었다는 데서 나온 혜국사, 팔왕폭포, 역사의 애환과 수많은 사연을 지닌 문경새재 제1, 2, 3관문과 KBS촬영 등이 있다.
○ 문경새재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등의 뜻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뒤 이곳에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3개의 관문(사적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또한 과거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과 장사꾼들의 길목으로, 또 왜군이 신립장군 부대를 격파하고 한양으로 쳐들어갔던 길목으로 애환의 역사가 서린곳. 이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 산불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운 산불됴심 표석, 군수나 현감의 공덕을 찬양하는 선정비,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동학과 의병의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 민요 등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문경새재는 1925년 이화령이 뚫리면서 대로로서의 생명은 사실 마감했지만 1981년 문경새재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됨으로써 조령 제1,2,3관문을 비롯한 문화재와 역사를 답사하는 옛길로 거듭 명성을 지키고 있다.
○ 문경새재 과거길(옛길)
영남에서 한양을 다닐 수 있는 길은 조령(문경새재)와 죽령 및 추풍평을 경유하는 세 갈래가 있는데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으며,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길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길이다.
[이진터(二陳祉)]
임진년(1592년)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15,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않리에서 진을 치고 정탐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장군이 농민 모병군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으나 왜군 초병이 조선초병 머리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